♬ 음악이야기

한국의 키타리스트들

해피57 2018. 8. 24. 18:36
1)최구희

 

일명 ‘기타계의 도인'으로 통하는 최구희는 오래 전부터 록에 한국적인 요소를 많이 집어 넣고자 하는 시도들을 해 왔다. 그는 제프 벡이나 지미 헨드릭스 등으로부터 영향받아 자신의 스타일을 완성했는데 한때는 잉베이 맘스틴 등에 충격을 받아 열심히 속주를 파기도 했다. 그 때문에 그는 80년대 후반까지 ‘한국의 잉베이 맘스틴'이란 소릴 들을 만큼 속주주자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그의 연주에서 하모닉마이너와 디미니쉬 스케일에 의한 솔로잉을 들을 수 있던 것도 모두 잉베이의 영향 때문이다.

기타리스트로서 최구희의 강점이라면 톤 감각이다. 그의 기타음색은 화사하고 풍요로우며 아름답기까지 하다. 때에 따라선 색채적인 변화까지 느낄 정도이다. 프레이즈에서 느껴지는 물결과도 같은 부드러움도 기타리스트로서의 그의 진가를 말해준다. 최구희는 우주가 바로 자신이라고 여길 정도로 기행을 일삼고 있는데 그는 이러한 천하태평과 유유자적의 상태를 즐기고 있는 듯 보인다. 자연의 소리와 새소리, 가야금 소리 등을 기타로 표현해내는 독창적인 기술은 그가 구사했던 많은 연주 가운데에서도 현재까지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2)이지웅

 

자그마한 체구(아마도 한국 록기타계에서 그가 가장 단신이리라)임에도 한때는 국내 헤비메틀계에서 알아주던 록 기타리스트로 이름을 날리던 장본인이 바로 이지웅이다. 1963년 6월 4일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 이지웅은 중학교 3학년에 다닐 때 엘비스 프레슬리의 광적인 팬이었던 동네 형님으로부터 기타를 배웠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직업적으로 음악을 해봐야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그가 음악을 해야겠다고 선언하자 집에서는 반대보다는 ‘할 수 있으면 해봐라'는 식으로 나왔다. 그래서 그는 오기가 생겨 독학으로 기타를 파기 시작했다.

부활(84)과 외인부대(86) 등을 거친 이지웅은 스티브 루카서를 좋아하며 필링에 있어서는 닐 숀을, 솔로 어프로치에 있어서는 프랭크 갬베일을 좋아한다. 헤비메틀 기타리스트로 출발해 이후에는 가요세션으로 이어지는 비교적 다양한 경험을 했다. 키가 작아 한때는 밤업소에서도 일을 못하게 해 좌절의 시간들을 보내기도 했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ESP 기타는 그 자신이 튜닝을 개조한 것으로 기존의 기타들과는 좀 다르다. 이지웅의 기타세계는 크게 세 가지의 중요한 변화를 겪었다. 그가 록계에 나오던 80년대 중반에서 후반까지는 외인부대 등의 헤비메틀 밴드에서 격렬하고 공격적인 플레이를 추구했다. 왼손의 핑거링이 잘 살아나는 정통적인 패턴의 연주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90년대 초반으로 들어서면서 퓨전재즈 쪽으로 관심을 돌려 상큼하고 깔끔하며 도시적인 이미지의 기타(특히 리듬기타가 강조되는)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90년대 중반으로 들어서며 팝 쪽으로 신경을 써 보다 대중적인 멜로디의 흐름을 낳는 연주를 들려주고 있다
 
 
3)이현석

 

이현석은 자타가 공인하는 하이테크니션이다. 그의 피킹실력은 놀라울 정도이다. 눈부신 스피드 속에서도 정확하고 타이트한 얼터네이트 피킹속주를 구사한다. 이현석은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고 누나와 형들이 악기를 연주하는 보면서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가 중2때 부모님의 권유로 클래식 기타를 시작한것이 훗날 그의 인생을 바꾸어 버렸다.

어느 날 그는 TV에서 김수철의 연주를 보고 충격을 받았고 송골매의 모습도 많은 자극을 주었다. 이때부터 일렉트릭 기타를 열심히 배우게 되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발모아라는 스쿨밴드의 기타리스트로 활동했으며 미국유학 중에도 기타만을 파고들었다.

이현석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기타리스트들은 김수철, 리치 블랙모어, 잉베이 맘스틴 등이다. 91년에 그는 자신의 연주가 담긴 데모테입을 완성해 한국에 왔다. 그의 솔로데뷔앨범은 92년 초에 공개되었다. 이 앨범은 발매되자마자 좋은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이현석은 국내 기타계에서 주목받는 테크니컬 기타리스트가 되었다. 이후 그는 계속해서 2집과 3집을 발매하면서 속주기타에 있어서 부동의 위치를 고수했다. 한편 이현석은 얼마 전 비밀리에 결혼을 해 팬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이현석은 속주를 참으로 쉽게 한다. 고난도의 기술과 순발력을 요하는 것임에도 그는 자세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숨소리하나 크게 내쉬지 않으면서 극히 자연스럽게 전개한다. 거기에 노래까지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속주귀신'이라 할 수 있다. 클래식적인 사고 위에서 록 기타를 전개해 가는 그는 국내에 몇 안 되는 인스트루멘틀 기타를 추구하는 연주자인 셈이다
 
4)김도균
 
김도균은 신대철 등과 함께 80년대 한국 헤비메틀 기타를 다진 인물이다. 1964년 5월 11일 대구에서 태어난 그는 중2 때부터 일렉트릭 기타를 잡기 시작해 리치 블랙모어, 랜디 로즈 등을 카피했다. 고등학교에 가선 바이올린 등도 배우며 클래식 음악에도 관심을 가졌지만 고2때가 되던 어느 날 핑크 플로이드의 앨범 [The Wall]을 듣고 감동해 산으로 올라 음악에만 전념하는 기행을 보이기도 했다.

한편 김도균은 국민학교 때부터 영어선생으로부터 개인교습을 받아 능숙한 회화를 구사하며 그 외에 도나 우주에 관한 쪽에 많은 관심을 가져 그것을 음악화하기도 했다. 사실 김도균의 어릴적 꿈은 천체물리학자였다.

김도균은 백두산을 결성해 헤비메틀을 연주하던 그는 이어 아시아나를 조직해 영국 등지로 가 활동하기도 했다(아시아나는 지난 89년 9월 라우드니스의 한국 공연 때 오프닝으로 무대에 서기도 함). 95년경에는 TV 공연프로그램인 [샘이 깊은 물]에 고정출연하며 국악과 록을 접목한 연주를 들려주기도 했다.

기타리스트로서 김도균을 생각하게 되면 가장 먼저 ‘힘'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그의 연주를 듣고 있으면 테드 뉴전트의 스타일을 감지할 수 있다. 거칠고 공격적이며 강력한 힘이 실리는 남성적인 기타는 억세다는 표현이 맞을 만큼 선이 굵은 것이다. 특히 손 힘이 워낙 좋아 깊은 비브라토와 벤딩주법에 있어서는 당할 자가 없으며 핑거링의 깊이와 그 진폭은 가히 세계적인 수준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순발력에 있어서는 속주 얼터네이트 피킹 등을 비롯해 몇 가지 부분에서 오른손의 취약점을 보이기도 하지만 펜타토닉 어프로치에 의거한 연주라는 측면에서는 김도균 만큼 힘찬 피킹과 핑거링을 구사하는 플레이어를 발견하기 힘들다. 이외에 그는 국악적인 주법들을 일렉트릭 기타에 담는 노력도 시도해 화제를 낳기도 했다.
 
5)신중현
 
신중현은 한국 록기타의 거성이다. 1940년 11월 14일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미8군쇼에서 ‘재키'라는 이름으로 활약하며 올맨 브라더스 등과 같은 곡들을 연주해 큰 호응을 얻어냈다. 그룹 에드 포(64) 이후 덩키스, 골든그레이브스, 더 맨(72) 등을 거쳐 이남이 등과 함께 74년 엽전들이라는 그룹을 조직했다. 그는 이 밴드에서 실험적이며 사이키델릭적인 하드록 사운드를 추구하며 한국 록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한편 이 기간동안 그는 박인수, 김추자, 장현, 이정화, 김정미, 장미리 등 많은 가수들을 발굴해 키워내기도 했다. 그러나 대마초 사건으로 인해 75년경 연예활동정지를 당하고 구속되고 말았다. 이때부터 그는 약 5년 동안 암흑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그후 80년 11월 신중현은 뮤직파워라는 밴드를 이끌고 '아름다운 강산'을 크게 히트시켰다. 그리곤 83년 가을 이남이 등과 함께 세 나그네를 이끌고 전통적인 록 사운드를 연주했다.

그는 음악연주 및 공연문화의 활성화를 위해 86년 이태원에 라이브 무대를 열었고 88년에는 ‘우드스탁'이라는 카페를 열기도 했다. 96년에는 여자들로만 구성된 기타스트라라는 일렉트릭 기타 위주의 대규모 밴드를 구성해 화제를 낳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그의 음악적 업적을 기리는 [A Tribute To 신중현]가 나와 다시 한번 한국 음악계에서의 그의 위치를 가늠하게 해주었다.

기타리스트로서 신중현은 벤딩기술과 비브라토를 독창적으로 잘 살리는 연주를 구사한다. 아마도 그의 벤딩들은 록기타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힘들만큼 개성적이며 특별한 것이다. 이것은 체구에 비해 유난히 손이 큰 그의 기이한(?) 신체적 조건과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신중현 자신은 그러한 주법들을 국악적인 악기들에서 응용을 했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그는 블루스록 기타리스트이고 핑거링의 쓰임이 독특한 프레이즈를 연출하고 있다. 60년대 말엽에서 70년대 초반까지 그는 사이키델릭 하드록 기타를 추구했고 70년대 중·후반에는 블루스록을 연주했으며 8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기타연주보다 어레인지나 곡만들기 등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6)손무현
 
손무현은 1968년 9월 5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선배 및 동료 세션연주자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 그것은 깔끔하게 세션을 풀어가기 때문이다. 손무현은 국민학교 6학년에 다닐 때부터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그는 음악을 하겠다고 선언을 했어도 집에서는 그다지 반대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음악계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헤비메틀 밴드 외인부대에서 이지웅과 트윈 리드기타를 펼치면서이다. 다시 말해 그는 헤비메틀 기타리스트로 록계에 데뷔한 셈이다. 외인부대 해체이후 그는 팝 쪽으로 관심사를 돌려 제2의 음악출발을 감행하게 된다.

93년에는 자신의 그룹 더블트러블을 결성해 독자적인 활동을 보여주기도 했다. 팝과 스탠더드,, 모던 블루스록 등등 그 모두를 연주에 담아보겠다는 손무현의 생각은 그러나 쉽게 실현되지는 않았다. 더블트러블을 이끌면서 그는 꾸준히 세션을 했고 이제는 밴드의 리더로서보다는 세션 기타리스트로서 더욱 그 진가를 인정받는 존재가 되었다.

현재 손무현은 밴드활동보다는 스튜디오 세션 등에 주력하고 있다. 손무현은 연주력이라는 측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기도 하지만 곡을 만드는 능력이나 어레인지 솜씨 등 전반적인 곡 작업에 있어서는 젊은 세대의 뮤지션들 가운데에서 일급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7)신대철
 
두말할 나위 없이 신대철은 80년대 한국 헤비메틀 기타를 리드했던 장본인이다. 음악가문 중에서도 한국 최고의 로열 패밀리랄 수 있는 ‘신중현-신대철-신윤철' 등의 가족 중 가장 혈기왕성한 헤비메틀을 연주했던 그는 너무 어린 나이에 록 기타계의 스타가 되어버려 그만큼 살아가는데 제약을 받아야만 했다.

국민학교 때부터 아버지가 기타를 치는 것을 유심히 바라보던 그는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이미 일렉트릭 기타를 잡기 시작했으며 고교시절에는 아예 공부는 ‘생략'해 버리고 딥 퍼플, 레드 제플린, 레인보우 등을 카피하며 실력을 다졌다. 그러다가 시나위를 결성해 80년 대초·중반의 한국 메틀계를 이끌었다.

시나위는 여러 차례에 걸쳐 멤버교체의 진통을 겪으면서도 해산-재결성-해산 등을 반복해가며 지금까지 버티고 있다. 신대철의 기타는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번 그 모습을 달리 했다. 그가 록계에 등장하는 80년대 초·중반만 해도 마이클 쉥커리치 블랙모어 등을 위시한 정통적인 하드록 기타주법을 구사했으나 잉베이 맘스틴의 등장으로 그는 테크니컬 속주기타의 세계에 빠져버려 음의 낭비가 많은 ‘여과되지 않은' 속주를 구사했다.

그리곤 90년대 초반으로 들어서면서 조 새트리아니적인 스타일에 경도되었고 얼마 안가선 다시 정통 블루스록에 심취해 ‘자유' 등과 같은 밴드를 결성해 활동했다. 그리곤 재결성된 시나위에서는 난데없이 얼터너티브록을 연주해 주변 팬들을 놀라게 했다.

신대철은 시나위에서 밴드활동을 하는 와중에도 세션작업을 활발하게 해 다방면에 걸친 그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현재 그가 이끌고 있는 시나위는 음악적으로 너무 식상한 패턴의 사운드를 들려주고 있어 안타까움을 준다
 
8)배재범
 
배재범은 부산 출신의 젊은 기타리스트들 가운데에서는 테크닉이 가장 출중한 연주자이다. 특히 그의 피킹솜씨는 세계적인 것으로 유명 기타 플레이어들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아니 그 이상일수도 있다). 배재범과 임덕규의 출현은 부산의 기타수준을 한 단계 높인 것이며 나아가 한국 일렉트릭 기타를 풍요롭게 만든 동인 중의 하나가 되었다.

1969년 2월 2일 부산에서 태어난 배재범은 국민학교 4학년 때부터 기타를 잡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중학교 2학년에 들어가면서 독학으로 일렉트릭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 그에게 큰 영향을 준 것은 잉베이 맘스틴울리히 로스였다. 특히 그는 잉베이로 인해 속주기타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파가니니나 그 외의 클래식 대가들의 곡들까지도 연구하게 된 것이다.

배재범은 89년 4월 바로크메틀을 추구하는 그룹 디오니서스를 결성해 2장의 앨범을 발표하며 한국 록계에 속주기타의 새별로 떠올랐다. 니체의 명저 [비극의 탄생]에서 힌트를 얻어 그룹명을 디오니서스로 만든 이들은 배재범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보였으나 얼마 후 해체되고 배재범은 퓨전재즈 쪽으로 관심사를 옮겼다. 그리곤 솔로로 독립해 연주활동을 했는데 퓨전재즈를 하면서도 그는 뛰어난 피킹을 앞세우는 테크니컬한 재즈기타의 세계를 선보였다.

솔로로 활동하면서 자주제작한 솔로앨범을 공개했으나 기대만큼 성공을 거두지 못하자 그는 잠시 음악계를 떠난 듯 보였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부산 쪽에서 기타강사로 일하며 후배들 양성에 관심을 쏟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최근에도 배재범은 기타레슨에 주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9)김목경
 
김목경은 1957년 7월 7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인물은 에릭 클랩튼인데 그는 클랩튼을 주제로 한 히트곡을 만들어 대중적인 명성을 얻기도 했다. 김목경은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어느날 음악을 해야겠다고 결심하던 중 78년에 약 3개월동안 의정부의 밤업소에서 기타리스트로 활동했는데 이것이 직업적으로 뛰어든 계기가 되었다. 79년에 계명대 일어과 입학했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은 여전해 공부보다는 기타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러던중 음악공부를 체계적으로 해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외국유학을 결심한다.

드디어 그는 84년 6월 레코딩 엔지니어가 되기위해 영국 유학길에 올랐으나 경제적 문제 때문에 동년 9월 ‘아메리칸 칼리지 인 런던 커머셜 아트'에 입학하게 된다. 89년 5월에 이 학교를 졸업하고 현지에서 가수활동을 시작했으며 때론 거리에서도 기타를 치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도 했다. 이즈음 그는 미드나잇 블루스 밴드(Midnight Blues Band)에서 연주를 해 몇몇 사람들에게는 꽤 알려진 기타리스트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는 몇 년 간의 영국유학을 끝내고 89년 12월에 한국에 귀국했다. 그리곤 솔로앨범을 내기 위해 음반사와 접촉을 시도해 결국 90년 4월에 첫 솔로데뷔앨범을 만들기에 이른다. 그후 몇 년의 공백기가 있었고 김목경이라는 이름이 세인들의 뇌리에서 잊혀지는가 싶더니 96년경에 두 번째 앨범을 내며 다시 음악계에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는 마샬앰프를 무척이나 싫어한다.
“마샬앰프는 연주를 할 때 오히려 기타리스트의 기분을 깍아 버립니다. 펜더앰프가 무난한 것 같아요."
김목경은 에릭 클랩튼 및 로이 부캐넌, 하울링 울프, 버디 가이 등을 좋아하며 이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또한 컨트리도 좋아해 멀 해거드와 벅 오웬스의 음악에 심취하기도 했다
'정통으로 복귀하자'라는 기치 아래 1990년대 이후 블루스와 재즈에 대한 재조명이 되기 시작했고 이에 대한 음악팬들의 관심도도 높아졌다. 한때 국내에서도 제법 거세게 불던 재즈열풍이 '거품'으로 판명이 난 듯한 지금, 분위기에 휩쓸려 멋모르고 재즈음반을 사가던 가요팬들은 대부분 자취를 감춘 듯하다. 그에 비해 블루스는 그 음악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우리 음악팬들로부터 철저히 소외되고 있는 '저주받은' 장르인 것 같다. 본격적인 블루스를 추구하는 뮤지션의 수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국내에서도 끈질기게 블루스의 생명력을 이어오고 있는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김목경이다.

앞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진정한 록뮤지션이라면 한결같이 그들 음악의 근원이자 종착역, 그리고 지향으로 삼고자 하는 음악이 바로 블루스일 것이다. 윌리 딕슨은 "블루스는 뿌리이고 다른 모든 음악들은 그 열매"라고 말했고 시카고 블루스의 명인 머디 워터스는 "블루스는 사람들이 로큰롤이라고 부르는 자식을 낳았다"고 했는가 하면, J. B. 리토는 "블루스는 세상에 종말이 와도 블루스이며, 결코 사멸할 수 없는 원형"이라고 말했을 정도이다.

이상의 말들은 지난 수십년 동안 영·미권을 중심으로 대중문화의 지표역할을 해온 록음악에 대해 블루스가 갖고 있는 상대적인 지위를 단적으로 표현한 의미일 것이다. 한편, 국내에서는 신촌블루스의 성공(그들이 진정한 블루스 뮤지션이었는지 아니면, 블루스에 듣기 좋은 가요를 적절히 접목시킨 상업주의자들이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었지만)으로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에는 여기저기서 블루스 관련음반을 제작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지만, 대부분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이 시기에 음반을 발매한 몇몇 뮤지션들 중 라이브무대와 음반활동을 통틀어서 현재까지 왕성하게 활동중인 기타리스트는 김목경 뿐이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인간이다. 컴퓨터문명이 아무리 발달했다고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아직까지도 음악과 문학, 미술이다. 같은 맥락으로 가장 인간다운 음악이 인간을 가장 감동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에는 자극적이고 말초적인 음악들이 유행하고 있지만, 인간미가 배제된 리듬위주의 음악은 단명하기 쉬울 뿐이다."
김목경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인물은 바로 '미스터 슬로우 핸드(Mr. Slow Hand)'로 불리우는 블루스 리바이벌(Bluse Revival)의 주역, 에릭 클랩튼이다. 참고로 블루스 리바이벌이란, 1950년대 로큰롤이 전성기를 구가할 때 영국과 미국의 젊은 음악인들이 그 근원을 찾아가게 되고 1960년대 중반쯤에는 로큰롤을 거슬러 올라가 R&B를 거쳐 팝음악의 모태인 블루스를 찾아내는데, 반전과 민권운동대열에 선 학생들이 피압박민들의 음악인 블루스와 뜻을 같이 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는 에릭 클랩튼 이외에도 지미 헨드릭스, 제프 벡 등이 기수였고, 미국은 남부 텍사스 출신의 재니스 조플린, 지지 탑, 스티브 밀러, 올맨 브러더스 등이 팝의 고향을 그리워했다. 김목경이 추종하는 에릭 클랩튼은 현재 '기타리스트'로서 보다는 발표하는 앨범마다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는 '싱어 송라이터'로 각광을 받고 있는 거물이다. 그의 음악스타일이 과거의 그룹활동 시절에 비해 보다 팝적으로 선회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나 거장은 블루스를 하든 록을 하든 팝을 하든 역시 거장이라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그리고 김목경의 음악적 뿌리의 연결고리는 프레디 킹과 더 나아가서는 버디 가이, 머디 워터스에게까지 이어진다. 그 밖에 레드 제플린롤링 스톤즈, 리너드 스키너드, 두비 브러더스, 조 카커 등 그가 어려서부터 듣고 자란 여러 뮤지션들로부터 음악적 자양분을 흡수하였다.
"지구상에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존재하지만, 연주자의 혼이 깃든 블루스야말로 진정한 음악이라고 생각된다. 세계의 대중음악을 지배하는 양대 장르는 흑인들의 힙합이 아닌, 바로 블루스와 컨트리다. 한국에도 블루스를 연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서 이들이 함께 모여 블루스 페스티벌도 하고 TV에도 출연하고 했으면 하는 게 나의 바램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희망사항이 있다면 싱글시장의 활성화이다. 먼저 싱글을 낸 후에 반응을 살핀 후 정규앨범을 내는 선진국형 시스템 말이다.”

김목경은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중학교 2학년 때 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아마추어 시절 누구나 그렇듯) 서러운 무명시절을 거쳐 대학에 입학한 후에도 학업보다는 기타연습에 더욱 매진하였고 제대로 된 음악공부를 하기로 결심한 그는 1984년 6월 레코딩 엔지니어 수업을 받기 위해 영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러나 경제적 문제 등에 부딪혀 같은 해 9월 '아메리칸 칼리지 인 런던 커머셜 아트'에 입학하게 되고 이 학교를 졸업한 후 현지에서 뮤지션생활을 하기도 했다. 당시 그는 미드나잇 블루스 밴드(Midnight Blues Band)에서 연주를 해 몇몇 사람들에게는 꽤 인정받는 기타리스트로서 알려지기도 했다.
"영국에서의 음악수업 중에 내가 깨달은 것은 크게 두가지다. 하나는, 기타는 좋은 악기와 장비로 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치는 것이라는 점이다. 블루스는 기타에 악세사리(이펙트)를 하나도 사용하지 않는다. 앰프와 기타만으로 자신의 톤을 만들어 나가는 굉장히 솔직하고 인간적인 음악이다. 그리고 두번째로 느낀 점은, 기타리스트로서의 '마음가짐'이자 뮤지션답게 행동하는 것이다."

그는 몇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1989년 12월 한국에 귀국했다. 자신의 솔로앨범을 내기 위해 레코드사와 접촉을 시도해 결국 다음해 4월, 영국 현지에서 녹음한 첫 솔로앨범 [Old Fashioned Man]을 국내에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 앨범에는 현지의 뮤지션들인 레이 하이우드(기타, 키보드), 제임스 가프리(베이스), 제임스 다톤(드럼)이 참여했고 '내가 본 마지막 그녀'와 그가 추종하는 에릭 클랩튼을 주제로 한 'Mr. Clapton' 등이 수록되어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발표한 4장의 앨범 모두에 애착을 가지고 있지만, 그 중에서 데뷔앨범은 내게 있어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당시 나는 젊었고 영국에서 고생 끝에 발표했기 때문에 순수한 음악적 열정이 담긴 음반이다.”

1993년,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엄인호, 정경화, 조준형 등과 함께 [Super Stage]라는 블루스 실황앨범을 공개했다. 이후 몇년간의 공백기가 있었고 김목경이라는 이름이 음악팬들의 뇌리 속에서 사라질 무렵인 1995년에 두번째 앨범을 공개하며, 다시 음악계로 돌아왔다. 1집이 블루스에 대한 순수한 마음을 담은 앨범이었다면, 2집에서는 여기에다 한국적인 감성과 대중성을 겸비하려고 했는데, 생각한 만큼의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고 한다. 2년 후 그가 너무나 좋아하는 대선배 신중현의 트리뷰트 앨범 [A Tribute To 신중현]에 자발적으로 참가하여 '빗속의 여인'을 연주했고, 1998년에는 이민영(키보드), 유병선, 유종훈(베이스), 은성태(드럼)와 함께 한 3집 [Living With The Blues]를 공개하게 된다. 서양의 블루스에 가요적인 파퓰러한 감각을 절충한 '한국적 블루스'로는 국내의 대중음악계에서 그 어떠한 반향도 불러일으킬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한 그의 자포자기 심정을 담은 음반으로 대중성을 배제한 채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순도높는 블루스음악을 표출하였고 한다. 그 이듬해에는 그가 고교시절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하는 명그룹 산울림에 대한 헌정음반 [산울림 트리뷰트]에 '독백'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2000년 1월에는 3집 이후 2년만에 4집 [Play The Bluse]를 발표했다. 전곡의 작곡과 작사, 프로듀싱까지 도맡은 이번 앨범에서 그는 현악파트를 도입하고 녹음과정 일부에서 라이브를 시도하기도 하는 등 데뷔앨범을 준비하던 때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정성을 기울였다
 
 
10)임덕규
 
1966년 7월 25일 경남 김해에서 태어난 임덕규는 명실공히 부산을 대표하는 록 기타리스트이다. 89년 동아대학교 체육학과를 졸업한 그는 남들보다는 훨씬 늦은 18살 때부터 일렉트릭 기타를 시작하였다. 그럼에도 불과 몇 년만에 뛰어난 테크닉들을 완벽하게 마스터했다. 기타를 잡기 전에는 드럼을 쳤다고 한다.

임덕규는 89년에 헤비메틀 밴드 스트레인저를 결성해 뛰어난 명연을 펼쳤다. 그러나 2집 제작을 앞두고 음반사와의 계약상의 문제와 멤버들의 갈등 등이 겹쳐 난항을 빚다가 결국 스트레인저는 해산되고 만다. 팀 해산 후 다시 밴드를 재결성해 록계에 나왔으나 역시 현실적 벽을 뚫지 못하고 좌초되고 말았다. 현재 임덕규는 부산에서 기타학원을 운영하며 강사로 일하고 있다.

그는 그 어떤 록커들보다 많은 음악을 듣는 것으로 유명하다. 헤비메틀에서 재즈, 블루스록, 컨트리 등등 많은 장르의 음악을 들으며 그것을 연주시 응용하기도 한다. 임덕규에게 영향을 준 기타리스트들은 무척 많지만 그 중에서도 스티브 스티븐스, 조 새트리아니, 더그 앨드리치, 스티브 바이 등을 꼽을 수 있다.

스트레인저의 데뷔앨범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마이클 쉥커와 같은 정통적인 기타 스타일과 잉베이 맘스틴 등의 바로크속주 등을 종합한 기타스타일을 추구했다. 속주 테크니션들이 오른손의 피킹만 화려함을 자랑한다면 그는 왼손과 오른손 모두 화려하게 구사해 뛰어난 명연을 펼친다.

힘이 실리는 절도와 운치 있는 멜로디라인, 거기에 예리하게 조여드는 리듬감 등 그는 요 몇 년 간 한국에서 등장한 그 어떤 록 기타리스트들보다 뛰어난 정통파 기타의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임덕규는 처음에는 바로크메틀을 추구하며 속주를 전개했었으나 시간이 가면서 전통적인 형태의 블루지한 하드록 스타일로 변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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